-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 역사,지리,관광 > 아시아사
- 송기호 [저] l 초판 2011.05.30 l 발행 201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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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
책소개
분류 | 역사,지리,관광 > 아시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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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2111470 |
초판발행일 | 2011.05.30 |
최근발행일 | 2016.08.31 |
면수/판형 | 440(쪽) / |
이 책은 渤海政治史硏究(1995)에 이어서 두 번째로 내는 발해사 연구서이다. 앞 책에서는 주로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발해사의 전개과정을 복원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한다면, 이 책에서는 고고자료를 많이 활용하여 발해의 사회구조 및 문화사, 고구려 계승성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제Ⅰ부는 발해 건국 집단의 種族的 屬性에 관한 연구로서 앞 책에서 이미 문헌으로 접근했던 것을 이번에는 고고학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제Ⅱ부는 지방 사회의 지배구조와 그 실상을 파악한 것이다. 제Ⅰ부와 제Ⅱ부가 사회사 연구라고 한다면 제Ⅲ부는 문화사 연구로서, 발해 불교의 전개과정을 정리해보고 새로운 불상 명문을 소개하는 데에 치중했다. 제Ⅳ부는 발해사의 핵심 논쟁으로서 단시일내에 해결하기 어려워 일단 보류해두었던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穿鑿해본 것이다.
제1장은 발해 건국세력이 묻혀 있는 곳으로 지목되는 六頂山古墳群 자료를 재정리하고, 이를 粟末靺鞨 고분 및 高句麗 고분과 비교하여 분석한 것이다. 육정산고분군을 분석해보니, 고분 양식에서 高句麗的인 요소가 강한 반면에 副葬 陶器와 埋葬 習俗에서는 靺鞨的인 요소가 강하였다. 두 가지 요소는 고분군의 區域에 따라서도 달리 나타나는데, 제1구역 중·하부에서는 고구려적 요소가 두드러지고, 제1구역 상부와 제2구역에서는 말갈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발해 건국집단이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었으되 상층부는 고구려인이 우세했던 반면에 하층부는 말갈인이 다수였던 사실을 반영한다.
제2장은 발해 건국의 한 축을 이루었던 粟末靺鞨의 원류를 밝힌 것이다. 과거 扶餘國 지역에서 속말말갈이 發祥한 사실을 들어서 扶餘人이 그 母胎가 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속말말갈은 勿吉이 西進하여 형성된 것으로 부여와는 무관하니, 이 사실은 楡樹 老河深 유적을 통해서 확인된다. 老河深 中層은 前期 扶餘의 유적이고 上層은 속말말갈의 유적인데, 두 층위 사이에는 큰 시간적 공백이 있는데다가 고분 양식, 매장 방식, 부장품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부여에서 속말말갈로 계승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따라서 서로 종족적 속성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속말말갈의 陶器는 부여 도기와 다르고 다른 말갈족과 相通하므로 물길의 확산으로 속말말갈이 형성된 것이 분명하다.
제3장은 발해 지방통치제도의 변화 과정과 지방통치의 실상을 검토한 것이다. 발해의 지방통치제도는 대체로 세 단계로 변모했으니, 초기에 고구려식 제도가 채택되었다가 나중에 당나라식 府州縣制로 전환되었고, 다시 부주현제가 변형되면서 郡·道 등이 도입되었다. 또 지금 18州의 75縣 명칭만 온전히 전해지는데, 발해에 62州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通說보다 훨씬 많은 200개 이상의 縣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해보았다. 발해의 지방제도 자체는 정연하게 잘 짜여져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중앙의 권력이 지방 깊숙이 침투하지 못했다. 지방의 독자적인 세력들 위에 중앙 권력이 얹혀 있었다. 이 한계는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고, 멸망 후에 渤海人과 女眞人으로 다시 분리되는 현상을 낳게 했다.
제4장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던 首領의 성격을 논한 것이다. 발해는 首領이란 용어를 당나라로부터 차용하여 지방의 독립적인 지배자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했다. 이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官職이나 官品을 받지 않아서 형식적으로는 말단 관리보다도 지위가 낮았지만, 실제로는 외국에 보내는 중앙정부의 使臣團에 동행할 정도로 실질 세력은 막강했다. 首領이 일반 백성을 직접 장악했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은 이들 위에 군림하였기 때문이다. 발해는 이런 수령 세력을 제대로 해체하지 못한 데에서 통치에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을 蕃國의 지배자로 설정하여 스스로 皇帝國을 自任했던 면도 보인다.
제5장은 발해의 독특한 제도인 5京制의 기원, 역할 및 후대에 끼친 영향을 밝힌 것이다. 발해 5경은 고구려 3京이나 통일신라의 5小京과 유래가 다르며, 8세기 중·후반에 설치된 당나라의 5京·5都에서 착안하여 대체로 760년대 중반쯤에 도입했을 것이다. 발해 5경은 수도가 북쪽에 치우쳐 있었던 점을 보완하고자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마련한 것이며, 5경 사이를 간선도로로 연결하면서 대내외 교통의 거점으로도 활용하였다. 발해 오경제가 직접적으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나라 제도는 단기간에 그친 반면에 발해는 이를 長期持續의 제도로 정착시켰고 요나라와 금나라에게까지 물려주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초기에도 발해 5경제를 모방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렇지만 고려 3경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제6장은 발해 불교의 역사를 몇 단계로 정리하고 몇 가지 특징을 추출해본 것이다. 8세기 초반의 건국기에 이미 불교가 유포되어 있었는데, 문왕 시기에는 왕권과 밀착되어 있었던 정황이 포착된다. 9세기에는 승려와 귀족의 불교 활동이 많이 나타나고, 사원 개창과 불상 조성도 활발해졌다. 멸망 후에도 遺民의 불교 활동은 遼陽 지방과 金나라 황실을 중심으로 지속되었으며, 특히 금나라 황실이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에 유민 출신의 后妃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발해 불교는 고구려 불교에 기반을 두면서 왕실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발전했으며, 觀音信仰과 法華信仰이 지역적으로 나뉘어 성행했다. 또한 景敎가 발해 불교계에 전래되어 습합된 현상도 일부 보인다.
제7장은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발해 불상을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한 연구이다. 咸和 4년(834)에 조성된 이 碑像은 당나라 초기 양식을 띠고 있어, 다른 발해 불상에서도 보이듯이 古式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도 阿彌陀如來의 脇侍菩薩로서 文殊舍利菩薩과 地藏菩薩이 함께 등장하는 점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또한 銘文에 許王府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발해에서도 親王制度를 실시했던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것은 발해왕이 내부적으로 황제적인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제8장은 문화사 연구 동향을 전반적으로 정리해본 것이다. 아직 이 방면의 연구는 깊지 못하고 쟁점도 별로 없으며 발굴조사 자료를 소개하는 데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발해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나는데, 중국에서는 발해 문화의 靺鞨的 基盤과 唐나라의 影響에 초점을 맞추고 러시아에서는 靺鞨的 傳統을 크게 강조하는 반면에 남북한과 일본에서는 고구려적 요소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발해 문화에 대한 이와 같은 一方的 視角은 국가 이해와 관련된 政治的 要因 때문에 나타나기도 하고 서로간에 발굴자료의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도 나타난다. 前者는 당장 해결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되지만, 後者는 학술 교류나 공동 발굴을 통하여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제9장에서는 발해에 대한 認識 및 文物制度의 측면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을 밝혀보았다. 발해인 자신의 기록을 보건대 지배층은 건국부터 멸망 후까지도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일본, 신라, 당나라 등 주변국에서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보기도 하고 말갈계 국가로 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고구려 계승국임을 인정하였다. 발해의 상층문화는 초기에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다가 점차 당나라 문화로 전환되었지만, 瓦當 문양, 불상, 쪽구들(炕) 등에서는 고구려 문화를 끝까지 고수된 면이 보인다.
제10장은 제9장의 연구를 보완한 것이다. 발해가 고구려계 국가를 표방한 사료는 많지만 말갈계 국가를 내세운 적은 없다. 발해 사신이 말갈 사신을 押領한 것으로 보아서, 발해는 말갈족을 他者化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를 모두 馬韓으로 호칭한 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後身으로 본 증거이다. 그렇지만 고구려 遺民인 高震 및 그의 딸 묘지명에 渤海人이라 한 것은 渤海國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명망 가문인 渤海 高氏의 일원임을 내세운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유민이 발해국에 귀속의식을 지녔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제11장은 발해의 난방시설인 쪽구들(炕)의 유래를 다룬 것이다. 쪽구들은 北沃沮人이 발명한 것으로서, 남쪽으로 전파되면서 高句麗에 유입되어 被支配層이 주로 애용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 후에 그 유민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되면서 쪽구들은 지배층의 생활문화로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발해에서는 都城 유적에서도 쪽구들이 등장한다. 沿海州에서는 북옥저인의 전통이 남아 있어 발해까지 이어진 면이 보이지만, 쪽구들 계승의 주된 경로는 북옥저 → 고구려 → 발해였다. 발해 쪽구들은 2고래가 중심을 이루는데, 이것은 1고래가 대다수인 고구려식 쪽구들을 발전시킨 것이다. 또 발해는 쪽구들을 靺鞨-女眞族에게 전수시켜 멸망 후에 쪽구들이 이민족에게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청나라의 炕은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다.
제12장은 龍頭山古墳群 龍海區域에서 최근에 발굴된 발해 고분 자료를 바탕으로 발해국의 속성을 다시 한 번 논한 것이다. 우선 발해는 고구려 계승국이었다. 이 사실은 石室封土墓를 기본으로 하는 고분 양식이나 M14호분에서 출토된 金製 冠裝飾 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鳥翼形 冠裝飾은 과거의 고구려 양식이 재현된 것으로 발해 왕실이 고구려계 인물이었음을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둘째 발해는 外王內帝의 국가였다. 이 사실은 이미 渤海政治史硏究에서 밝혔지만, 이번에 발견된 두 황후의 묘지명은 이 연구가 옳았음을 증명해준다. 최고지배자는 王이었지만 그 배우자는 皇后로 불린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외왕내제의 제도는 渤海에서 高麗로 계승되었다.
제1장은 발해 건국세력이 묻혀 있는 곳으로 지목되는 六頂山古墳群 자료를 재정리하고, 이를 粟末靺鞨 고분 및 高句麗 고분과 비교하여 분석한 것이다. 육정산고분군을 분석해보니, 고분 양식에서 高句麗的인 요소가 강한 반면에 副葬 陶器와 埋葬 習俗에서는 靺鞨的인 요소가 강하였다. 두 가지 요소는 고분군의 區域에 따라서도 달리 나타나는데, 제1구역 중·하부에서는 고구려적 요소가 두드러지고, 제1구역 상부와 제2구역에서는 말갈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발해 건국집단이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었으되 상층부는 고구려인이 우세했던 반면에 하층부는 말갈인이 다수였던 사실을 반영한다.
제2장은 발해 건국의 한 축을 이루었던 粟末靺鞨의 원류를 밝힌 것이다. 과거 扶餘國 지역에서 속말말갈이 發祥한 사실을 들어서 扶餘人이 그 母胎가 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속말말갈은 勿吉이 西進하여 형성된 것으로 부여와는 무관하니, 이 사실은 楡樹 老河深 유적을 통해서 확인된다. 老河深 中層은 前期 扶餘의 유적이고 上層은 속말말갈의 유적인데, 두 층위 사이에는 큰 시간적 공백이 있는데다가 고분 양식, 매장 방식, 부장품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부여에서 속말말갈로 계승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따라서 서로 종족적 속성이 달랐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속말말갈의 陶器는 부여 도기와 다르고 다른 말갈족과 相通하므로 물길의 확산으로 속말말갈이 형성된 것이 분명하다.
제3장은 발해 지방통치제도의 변화 과정과 지방통치의 실상을 검토한 것이다. 발해의 지방통치제도는 대체로 세 단계로 변모했으니, 초기에 고구려식 제도가 채택되었다가 나중에 당나라식 府州縣制로 전환되었고, 다시 부주현제가 변형되면서 郡·道 등이 도입되었다. 또 지금 18州의 75縣 명칭만 온전히 전해지는데, 발해에 62州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通說보다 훨씬 많은 200개 이상의 縣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해보았다. 발해의 지방제도 자체는 정연하게 잘 짜여져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중앙의 권력이 지방 깊숙이 침투하지 못했다. 지방의 독자적인 세력들 위에 중앙 권력이 얹혀 있었다. 이 한계는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고, 멸망 후에 渤海人과 女眞人으로 다시 분리되는 현상을 낳게 했다.
제4장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던 首領의 성격을 논한 것이다. 발해는 首領이란 용어를 당나라로부터 차용하여 지방의 독립적인 지배자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했다. 이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官職이나 官品을 받지 않아서 형식적으로는 말단 관리보다도 지위가 낮았지만, 실제로는 외국에 보내는 중앙정부의 使臣團에 동행할 정도로 실질 세력은 막강했다. 首領이 일반 백성을 직접 장악했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은 이들 위에 군림하였기 때문이다. 발해는 이런 수령 세력을 제대로 해체하지 못한 데에서 통치에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들을 蕃國의 지배자로 설정하여 스스로 皇帝國을 自任했던 면도 보인다.
제5장은 발해의 독특한 제도인 5京制의 기원, 역할 및 후대에 끼친 영향을 밝힌 것이다. 발해 5경은 고구려 3京이나 통일신라의 5小京과 유래가 다르며, 8세기 중·후반에 설치된 당나라의 5京·5都에서 착안하여 대체로 760년대 중반쯤에 도입했을 것이다. 발해 5경은 수도가 북쪽에 치우쳐 있었던 점을 보완하고자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마련한 것이며, 5경 사이를 간선도로로 연결하면서 대내외 교통의 거점으로도 활용하였다. 발해 오경제가 직접적으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나라 제도는 단기간에 그친 반면에 발해는 이를 長期持續의 제도로 정착시켰고 요나라와 금나라에게까지 물려주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초기에도 발해 5경제를 모방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렇지만 고려 3경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제6장은 발해 불교의 역사를 몇 단계로 정리하고 몇 가지 특징을 추출해본 것이다. 8세기 초반의 건국기에 이미 불교가 유포되어 있었는데, 문왕 시기에는 왕권과 밀착되어 있었던 정황이 포착된다. 9세기에는 승려와 귀족의 불교 활동이 많이 나타나고, 사원 개창과 불상 조성도 활발해졌다. 멸망 후에도 遺民의 불교 활동은 遼陽 지방과 金나라 황실을 중심으로 지속되었으며, 특히 금나라 황실이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에 유민 출신의 后妃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발해 불교는 고구려 불교에 기반을 두면서 왕실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발전했으며, 觀音信仰과 法華信仰이 지역적으로 나뉘어 성행했다. 또한 景敎가 발해 불교계에 전래되어 습합된 현상도 일부 보인다.
제7장은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발해 불상을 처음으로 학계에 소개한 연구이다. 咸和 4년(834)에 조성된 이 碑像은 당나라 초기 양식을 띠고 있어, 다른 발해 불상에서도 보이듯이 古式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도 阿彌陀如來의 脇侍菩薩로서 文殊舍利菩薩과 地藏菩薩이 함께 등장하는 점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또한 銘文에 許王府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발해에서도 親王制度를 실시했던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것은 발해왕이 내부적으로 황제적인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제8장은 문화사 연구 동향을 전반적으로 정리해본 것이다. 아직 이 방면의 연구는 깊지 못하고 쟁점도 별로 없으며 발굴조사 자료를 소개하는 데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발해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나는데, 중국에서는 발해 문화의 靺鞨的 基盤과 唐나라의 影響에 초점을 맞추고 러시아에서는 靺鞨的 傳統을 크게 강조하는 반면에 남북한과 일본에서는 고구려적 요소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발해 문화에 대한 이와 같은 一方的 視角은 국가 이해와 관련된 政治的 要因 때문에 나타나기도 하고 서로간에 발굴자료의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도 나타난다. 前者는 당장 해결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되지만, 後者는 학술 교류나 공동 발굴을 통하여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제9장에서는 발해에 대한 認識 및 文物制度의 측면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을 밝혀보았다. 발해인 자신의 기록을 보건대 지배층은 건국부터 멸망 후까지도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일본, 신라, 당나라 등 주변국에서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보기도 하고 말갈계 국가로 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고구려 계승국임을 인정하였다. 발해의 상층문화는 초기에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다가 점차 당나라 문화로 전환되었지만, 瓦當 문양, 불상, 쪽구들(炕) 등에서는 고구려 문화를 끝까지 고수된 면이 보인다.
제10장은 제9장의 연구를 보완한 것이다. 발해가 고구려계 국가를 표방한 사료는 많지만 말갈계 국가를 내세운 적은 없다. 발해 사신이 말갈 사신을 押領한 것으로 보아서, 발해는 말갈족을 他者化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를 모두 馬韓으로 호칭한 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後身으로 본 증거이다. 그렇지만 고구려 遺民인 高震 및 그의 딸 묘지명에 渤海人이라 한 것은 渤海國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명망 가문인 渤海 高氏의 일원임을 내세운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유민이 발해국에 귀속의식을 지녔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제11장은 발해의 난방시설인 쪽구들(炕)의 유래를 다룬 것이다. 쪽구들은 北沃沮人이 발명한 것으로서, 남쪽으로 전파되면서 高句麗에 유입되어 被支配層이 주로 애용하였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 후에 그 유민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되면서 쪽구들은 지배층의 생활문화로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발해에서는 都城 유적에서도 쪽구들이 등장한다. 沿海州에서는 북옥저인의 전통이 남아 있어 발해까지 이어진 면이 보이지만, 쪽구들 계승의 주된 경로는 북옥저 → 고구려 → 발해였다. 발해 쪽구들은 2고래가 중심을 이루는데, 이것은 1고래가 대다수인 고구려식 쪽구들을 발전시킨 것이다. 또 발해는 쪽구들을 靺鞨-女眞族에게 전수시켜 멸망 후에 쪽구들이 이민족에게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청나라의 炕은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다.
제12장은 龍頭山古墳群 龍海區域에서 최근에 발굴된 발해 고분 자료를 바탕으로 발해국의 속성을 다시 한 번 논한 것이다. 우선 발해는 고구려 계승국이었다. 이 사실은 石室封土墓를 기본으로 하는 고분 양식이나 M14호분에서 출토된 金製 冠裝飾 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특히 鳥翼形 冠裝飾은 과거의 고구려 양식이 재현된 것으로 발해 왕실이 고구려계 인물이었음을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둘째 발해는 外王內帝의 국가였다. 이 사실은 이미 渤海政治史硏究에서 밝혔지만, 이번에 발견된 두 황후의 묘지명은 이 연구가 옳았음을 증명해준다. 최고지배자는 王이었지만 그 배우자는 皇后로 불린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외왕내제의 제도는 渤海에서 高麗로 계승되었다.
목차
제 I부 건국집단의 성격
제1장육정산 고분군과 건국집단
1. 머리말
2. 육정산 고분군의 발굴 자료
3. 속주와 속말말갈 고분
4. 고분 자료의 비교
5. 건국집단의 구성
6. 맺음말
제2장속말말갈의 원류와 부여계 집단
1. 머리말
2. 부여설과 물길설
3. 물길의 서진과 속말말갈
4. 속말말갈 집단의 부여적 인소
5. 맺음말
제II부 지방지배와 수령
제3장지방 통치와 그 실상
1. 머리말
2. 지방 통치제도의 변천
3. 지방 통치의 실상
4. 맺음말
제4장수령의 성격
1. 머리말
2. 수령의 개념
3. 발해의 수령
4. 수령과 지방 사회
5. 맺음말
제5장5경제의 연원과 역할
1. 머리말
2. 5경제의 연원
3. 5경의 설치 시기와 역할
4. 후대에 끼친 영향
5. 맺음말
제 III부 불교와 문화
제6장불교의 전개과정과 몇 가지 특징
1. 머리말
2. 건국기의 불교 상황
3. 문왕의 불교 진흥과 왕권 강화
4. 9세기대의 불교 융성
5. 유민들의 불교 활동
6. 발해 불교의 몇 가지 특징
7. 맺음말
제7장함화사년명 발해 비상 검토
1. 머리말
2. 명문 분석
3. 양식 검토
4. 비상의 연대
5. 맺음말
제8장문화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1. 각국의 연구 개황과 문화 총론
2. 고고 연구 현황
3. 문화사 연구 현황
4. 연구의 시각과 과제
제IV부 고구려 계승성
제9장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1. 머리말
2. 발해인의 자의식
3. 주변국의 인식
4. 문물제도
5. 맺음말
제10장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보론
1. 머리말
2. 연구의 시각
3. 마한과 고구려, 발해
4. ‘발해인’의 의미
5. 맺음말
제11장발해 쪽구들의 유래
1. 머리말
2. 쪽구들의 전수자
3. 발해 쪽구들의 특징
4. 맺음말
제12장용해구역 고분 발굴에서 드러난 발해국의 성격
1. 머리말
2. 말갈족의 나라인가?
3. 당나라 지방세력이었나?
4. 맺음말: 남은 문제
논문출전 참고문헌
찾아보기 국문초록
중문초록
제1장육정산 고분군과 건국집단
1. 머리말
2. 육정산 고분군의 발굴 자료
3. 속주와 속말말갈 고분
4. 고분 자료의 비교
5. 건국집단의 구성
6. 맺음말
제2장속말말갈의 원류와 부여계 집단
1. 머리말
2. 부여설과 물길설
3. 물길의 서진과 속말말갈
4. 속말말갈 집단의 부여적 인소
5. 맺음말
제II부 지방지배와 수령
제3장지방 통치와 그 실상
1. 머리말
2. 지방 통치제도의 변천
3. 지방 통치의 실상
4. 맺음말
제4장수령의 성격
1. 머리말
2. 수령의 개념
3. 발해의 수령
4. 수령과 지방 사회
5. 맺음말
제5장5경제의 연원과 역할
1. 머리말
2. 5경제의 연원
3. 5경의 설치 시기와 역할
4. 후대에 끼친 영향
5. 맺음말
제 III부 불교와 문화
제6장불교의 전개과정과 몇 가지 특징
1. 머리말
2. 건국기의 불교 상황
3. 문왕의 불교 진흥과 왕권 강화
4. 9세기대의 불교 융성
5. 유민들의 불교 활동
6. 발해 불교의 몇 가지 특징
7. 맺음말
제7장함화사년명 발해 비상 검토
1. 머리말
2. 명문 분석
3. 양식 검토
4. 비상의 연대
5. 맺음말
제8장문화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1. 각국의 연구 개황과 문화 총론
2. 고고 연구 현황
3. 문화사 연구 현황
4. 연구의 시각과 과제
제IV부 고구려 계승성
제9장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1. 머리말
2. 발해인의 자의식
3. 주변국의 인식
4. 문물제도
5. 맺음말
제10장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보론
1. 머리말
2. 연구의 시각
3. 마한과 고구려, 발해
4. ‘발해인’의 의미
5. 맺음말
제11장발해 쪽구들의 유래
1. 머리말
2. 쪽구들의 전수자
3. 발해 쪽구들의 특징
4. 맺음말
제12장용해구역 고분 발굴에서 드러난 발해국의 성격
1. 머리말
2. 말갈족의 나라인가?
3. 당나라 지방세력이었나?
4. 맺음말: 남은 문제
논문출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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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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